수일간 내린 비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물에 잠겼던 솜뭉치 마냥 늘어진 남정네의 몸은 힘겹게 버스 정류장 의자에 기대어 흐릿한 시선으로 주위를 본다. 그 동공에 잠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으나 남자의 눈 안에 다시 작은 일렁임이 생기자 그는 몸을 일으켰다. 지병으로 인한 관절들이 비명을 질러 대지만 뭐라도 해야 했다.
과거 그는 사는 것을 좋아했다. 말하는 것을 좋아했고 나누는 것을 좋아했지만 지금은 지병으로 인해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처지에 간신히 일어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도 일어나 주위를 둘러본다. 자신을 기피하며 멀찌감치 떨어진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진다. 차라리 고향이었다면 주위에서 나뭇가지라도 주워 지팡이 삼으련만 다리를 질질 끌던 그의 시선이 커다란 장우산에 박힌다. 지팡이 대용으로 좋으리라 생각된 그는 불현 듯 근처 빌라를 찾아본다.
과거 그도 그랬다. 빌라에 살 때 우산이나 잡다한 물건을 문 앞에 놓아 두곤 했다. 마침 들어선 빌라에 우산이 보인다. 그리고 택배상자도 보인다. 마른 침을 삼키곤 택배 상자에 먼저 손이 갔다. 먹은 것이 없어 뭐라도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안에 든 것은 비싸보이는 기계장치들이라 굶주린 그에게 아무 쓸모 없었다. 차라리 옆에 있던 우산 하나가 지팡이 대용으로 훨씬 가치 있던 것이다. 또 다른 죄를 저질럿다는 자각도 있었지만 너무 움직인 탓인지 우산에 몸을 기대어 다시 정류장으로 돌아온 그는 사람들이 앉지 않은 틈을 타 몸을 정류장 의자에 뉘었다. 비 탓인지 움직인 탓인지 온 몸에서 비명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그래도 비명도 몇일 못 먹은 몸에서 나오느라 얼마 소리내지 못했다. 그리고 다시 잠이 든다.
잠에 취해 지친 그를 누군가 흔든다. 그리고 우산이 어디서 났냐고 묻는다. 화가난 것도 아니고 침착하고 조용한 말투였다. 덜컥 겁이 나고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배고픔과 통증에 사라졌던 이성이 우산 주인의 침착한 모습에서 돌아 온 탓인지 아니면 과거 자신의 평범했던 모습이 투영된 탓인지 그는 고개를 숙이고 힘겹게 "미안합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그간 숨겨야 했던 자책도 절망도 같이 밀려온다 고개는 더 무거워졌다. 목소리가 떨리며 비와 함께 내리듯 다시 흘러나왔다. "미안합니다. 몸이 좋지 않아서 그만 지팡이로 쓰려고 가져왔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는 우산 주인에게 우산을 내밀었다. 작은 소란으로 인해 정류장 주변 시선이 모였지만 이내 정류장이 그러하듯 버스가 오며 시선들이 사라지고 버스가 지나가더니 우산 주인의 침착했던 목소리도 비와 함께 물기를 품은 체 들려왔다. "아닙니다. 그냥 가지고 계세요. 그 우산은 당신껍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를 더 볼 수 없었던지 서둘러 우산 주인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돌아와 고개를 숙인 체 굳어버린 그의 허름한 겉옷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말한다. "이 걸로 식사도 좀 하세요. 미안합니다." 굳었던 그가 황급히 돌려주려고 했지만 우산 주인은 뭐가 그리 급한지 돌아가 버렸다. 다시 고개가 무거워진다. 그렇게 그의 두 손에는 정류장 천장으로 막혔을 터인데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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